비오는 날의 우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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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의 우산(하)
  • 이정순
  • 승인 2019.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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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별거 아닌 것 가지고 대게 폼 내네.”
기분을 상하게 하는 아이는 바로 종민이었다.

“이 자식이.”
마음 같아서는 주먹이라도 한 대 날려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종민이 보다 힘이 약해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종민이가 얼른 전학이라도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종민이의 비아냥거리는 말이 오래도록 귓가에 윙윙대는 것 같았다. 수업시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창문에 번개가 번쩍거렸다. 아침부터 잔뜩 먹구름이 드리워지더니 마침내 비바람이 세게 불었다. 갑자기 교실 안이 술렁였다. 장대비가 후두둑 떨어졌다.

“엄마 얏!”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우르릉 쾅쾅.’ 하늘에서 또다시 번쩍번쩍 빛이 났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하나 둘 일어나 창문 곁으로 몰려왔다.

“우산도 안 가져 왔는데 큰 일 났네.”
아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발을 동동 굴렸다. 거센 빗줄기가 쉴 새 없이 퍼부었다. 운동장이 벌써 질펀해보였다. 겁에 질린 아이들은 복도에 있는 전화기 앞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전화 부스에는 마중 나오라는 전화를 한다고 왁자지껄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비가 무섭게 오는 건 처음이야.”
한참 구경하고 있던 나도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이럴 때 휴대전화기가 있는 게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차를 가지고 달려오셨다. 엄마 차를 타려고 내가 막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종민이가 비스듬히 창가에 턱을 괸 채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못 본 척 얼른 시선을 돌려 버렸다.

“종민아, 너도 어서 집에 가야지.”
엄만 종민이를 알아보고 말을 건넸다. 종민이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비가 와서 지금 못 가요.”

“엄마한테 전화해보지 그래.”
엄만 부드럽게 종민이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깜빡하고 휴대전화기도 안 가져오고 전화기 앞에 애들이 많아서......”
종민이는 말끝을 흐리며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속으로 고소하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휴대전화기 있다고 자랑하던 자식이 오늘 같은 날 안 가져올게 뭐람. 나는 입을 삐죽거렸다.

“규야, 종민이 휴대전화기 좀 빌려 줄래?”
엄마는 내게 부탁을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얼굴을 찌푸렸다. 종민이에게 휴대전화기를 빌려줄 만큼 속이 넓지를 못했다. 자꾸만 심술이 나서 한동안 우물쭈물 거렸다. 그러나 엄마가 빤히 내려다봐서 어쩔 수가 없었다. 영 내키지 않았지만 종민이에게 마지못해 전화기를 건넸다.

“전화 오래하면 안 돼.”
난 퉁명스럽게 말했다. 요금이 많이 나올까봐 신경이 쓰였다. 휴대전화기를 들고 한참 뭐라고 통화를 하던 종민이는 볼멘 목소리로 말하며 나에게 건네주었다.

“엄마가 바빠서요.”
종민이는 말끝을 흐리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면 아줌마가 데려다 줄 테니까 어서 가자.”
엄만 종민이가 안됐는지 어깨까지 톡톡 치며 손을 잡았다. 말썽쟁이 종민이를 엄마는 왜 이렇게 따뜻하게 대해주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엄마는 그동안 종민이가 날 건드리고 물건도 망가뜨린 걸 모르실테지. 종민이는 나쁜 아인데 말이야. 종민이는 아무 말 없이 쭈뼛쭈뼛 따라왔다. 나란히 걸을 때도 나는 찬바람이 나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차 속에서도 나는 종민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멀뚱히 창밖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종민이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억울한 마음뿐이었다. 종민이 집 앞에 차를 세워주자 종민이는 비를 맞으면서도 엄마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규야. 잘 가.”
종민이는 나에게도 미소를 지었지만 난 겨우 눈만 말똥거리며 고개만 두어 번 까닥거렸을 뿐이다.

“어쩜 애가 저렇게도 인사성이 밝니? 규야, 너도 종민이 처럼 저렇게 인사를 잘 해야 한다. 저렇게 밝은 아인데 엄마 혼자 키워서 안 됐어. 엄마가 매일 밤늦도록 일을 해서 돌봐줄 시간도 없다던데..,그래도 저렇게 의젓한 걸 보면 참 기특해.”
엄마는 어디서 들었는지 내가 알지 못하는 일 까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그랬구나.”
갑자기 내 머리가 텅 빈 것 같았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나는 고개를 돌려 종민이가 우산도 쓰지 않고 사라진 길을 물끄러미 보았다. 우리 동네에서 외딴집에 사는 종민이. 엄마가 돌아올 때까지 혼자 기다려야 하는 종민이. 아빠랑 행복하게 사는 아이들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할까?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말씀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나는 종민이가 갑자기 가여워졌다. ‘종민아, 미안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종민이가 컴퓨터게임을 하자했을 때도 싫다고 핑계를 대며 우리 집에 오지 못하게 했다. 내가 좋아하는 농구를 하자고 집에 찾아 왔을 때도 일부러 바쁜 척 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마음속에는 종민이에 대한 탱자 가시 같은 마음 하나를 키우고 있었다. 그동안 종민이에게 잘 해준 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못해준 것만 떠올라 마음이 언짢았다. ‘어째서 난 종민이를 나쁘게만 생각했을까?’ 내가 뭐래도 인상을 찌푸리지 않고 환하게 웃는 종민이의 얼굴이 내 눈동자 속에 담겼다. 왠지 내 자신 무척 부끄러웠다. 종민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조금씩 빗물에 흘려보냈다. 내일은 꼭 종민이에게 웃어보여야겠다. 끝

이정순 사천초교 교사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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