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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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하)
  • 이정순
  • 승인 2019.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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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얼른 손을 내저었지만 할머니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습니다. 큰아버지는 어쩌다 고향에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하룻밤만 자고나면 바쁘다고 훌쩍 떠나기 바빴습니다. 할머니는 큰아버지의 차가 꽁무니를 빼며 멀리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아쉬움을 달래는 것 같았습니다. 찬동이는 큰아버지가 바람처럼 왔다가 휑하니 떠나도 좋은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큰아버지가 주시는 용돈 때문이었습니다. 큰아버지는 떠날 때쯤 찬동이를 불러 꼬박꼬박 돈을 쥐어주곤 했습니다. 찬동이는 그 돈으로 사고 싶은 물건들을 사는 재미에 빠졌었습니다.

이번에 세뱃돈을 받으면 게임기를 사려고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저께 동현이와 함께 가서 미리 봐두기까지 했는데 큰아버지가 안 오시니 찬동이도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할머니에게 세뱃돈을 많이 달라고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동현이는 식구들이 많아 세뱃돈도 많이 받고 참 좋겠다. 지갑이 빵빵하다고 엄청나게 자랑 하겠구나.’ 찬동이는 동현이가 우쭐될 모습만 그려보아도 은근히 속이 상했습니다. 설이 내일인데도 찬동이는 하나도 설레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찬동이는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넙죽 넙죽 절을 올리고 밥을 먹었습니다. 많은 음식을 두고 할머니와 단 둘이 먹으니 무슨 맛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차례 상을 다 물린 뒤 할머니는 찬동이를 불렀습니다.

“어이구, 우리 손자 얼마나 예쁘게 절하는가 보자.”
할머니는 옷매무새를 다듬으시더니 곧게 허리를 펴고 희미하게 웃으셨습니다.

“할머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오래 오래 사셔야 해요.”
찬동이는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할머니께 세배를 올렸습니다. 할머니는 가만가만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주머니에서 세뱃돈을 꺼내셨습니다.

“그래그래, 우리 찬동이 올해도 건강하고 착하게 잘 자라야 한다. 네가 어서 어서 쑥쑥 커야 해.”
할머니는 만 원짜리 세 장을 찬동이에게 건넸습니다. 세뱃돈을 펼쳐 보이던 찬동이는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와, 세뱃돈을 이렇게 많이 주세요? 할머니가 무슨 돈이 있다고.”
할머니가 이렇게 많이 세뱃돈을 줄줄은 몰랐습니다. 찬동이는 기뻐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똑똑똑.”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습니다.

“찬동아, 찬동아 있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문 밖에는 동현이 할머니가 서 있었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찬동이는 인사부터 꾸벅했습니다.

“찬동아, 이거 받거래이.”
동현이 할머니는 손에 꼬옥 쥐고 있던 만 원짜리 한 장을 찬동이의 손에 쥐어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찬동아, 그동안 너를 가만히 보니 인사도 잘 하고 심부름도 참 잘하더라.요즘 세상에 너처럼 착한 아이는 처음 본다. 그래서 너한테 세뱃돈이라도 주려고 이렇게 왔지. 쓰고 싶은데 잘 써.”
동현이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찬동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네? 할머니. 아니에요. 세배도 안했는데 돈을 받으면 ......”
깜짝 놀란 찬동이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잘 한 게 뭐가 있다고 동현이 할머니가 세뱃돈을 주시는지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찬동이는 재빨리 동현이 할머니께 돈을 내밀자 동현이 할머니는 손을 내저었습니다.

“찬동아 어서 받아. 내가 주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우리 동현이한테는 내가 돈 줬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말고. 알았지?”
동현이 할머니는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한 번 둘러보며 눈을 찡긋했습니다. 찬동이는 그때서야 저절로 입이 벌어졌습니다.

“할머니 고맙습니다.”
찬동이가 배시시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하는데 동현이가 깡총 거리며 대문 안으로 신나게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동현이 할머니는 동현이를 보자 넌지시
찬동이의 옆구리를 꾹꾹 찔렀습니다. 얼른 세뱃돈을 바지 주머니 속에 넣어라는 뜻 같았습니다.

“찬동아, 세뱃돈 얼마 받았니?”
동현이는 두툼한 지갑을 대뜸 흔들어 보이며 찬동이 곁에 바싹 다가와 으쓱댔습니다. 얼마를 받았는지 궁금해 죽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나?”
찬동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되물었습니다.

“넌 얼마 받았는데? 네가 먼저 말해 봐.”

“난 오 만원 받았다.”
동현이는 마음이 무척 들떠서인지 목소리도 컸습니다.

“나도 오 만원이야.”
찬동이는 씩 웃었습니다. 기가 죽기는 싫었습니다.

“뭐, 뭐라고? 거짓말이지? 진짠지 보자. 보자구.”
떨떠름한 표정으로 찬동이를 바라보던 동현이는 찬동이의 주머니에다가 손을 넣으려 했습니다.

“얘 좀 봐. 어쭈?”
찬동이는 동현이를 잠시 아래위로 번갈아보다가 콧노래를 흥얼대며 대문 밖으로 잽싸게 뛰어나갔습니다. 곁에 있는 동현이 할머니는 애써 헛기침을 했습니다.

“찬동아, 세뱃돈 좀 보자니까.”
동현이도 곧바로 찬동이 뒤를 후다닥 따라갔습니다.

“싫어. 싫다니까. 절대 안 돼. 메롱. 약 오르지.”
찬동이와 동현이의 목소리가 골목길에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끝)

이정순 사천초교 교사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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