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뱃돈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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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뱃돈 (상)
  • 이정순
  • 승인 2019.08.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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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땅거미가 내린 지도 한참 지났습니다. 쌀쌀한 바람이 할머니의 볼을 빨갛게 물들어 놓았습니다. ‘얘들이 오려면 아직 멀었나?’ 궁금하기 짝이 없는 할머니는 시린 손을 부비며 언덕배기에 서서 끝없이 큰 길을 바라봅니다. 마침 산모퉁이를 돌아오는 자동차 한 대에 눈을 떼지 못 할 때 찬동이가 저만치서 할머니를 부르며 뛰어왔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조금 전에 큰아버지한테서 전화가 왔는데요. 갑자기 일이 바빠 못 내려오신데요.”
찬동이는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헉헉거리며 말했습니다.

“무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올 설에 꼭 온다고 했어.”
할머니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쪼글쪼글한 눈을 껌뻑이며 찬동이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습니다.

“할머니, 정말 전화가 왔다니까요.”
찬동이는 할머니가 자신의 말을 못 믿는 것 같아 목소리를 키워서 말했습니다. 할머니는 서서히 얼굴빛이 변했습니다.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할머니는 씁쓰레한 표정이 선명했습니다. ‘명절에는 다들 쉴 텐데 너 큰아버지는 뭔 일이 바쁘다고 고향에도 안 내려오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조상에 대한 예의는 갖추어야지. 차례 올릴 사람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쯧쯧.’ 할머니는 서너 걸음 내딛다가 먼 산을 바라보며 혼자 중얼거리셨습니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는 일거리가 많았습니다. 이불을 빨고 집 안도 구석구석 말끔히 걸레질을 하셨습니다.

“찬동아, 이거는 너 큰아버지가 어릴 때 좋아했던 것들이야.”
이러시면서 식혜와 강정이며 가래떡을 만드셨습니다. 뒷집에 사는 동현이 할머니가 음식 좀 적게 하라 해도 할머니는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식구들이 많이 와서 음식도 많아야 된다며 웃어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도 하루 종일 일하면서 전화기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우던 할머니였는데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습니다. 찬동이는 할머니가 잔뜩 화가 난 것 같아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할머니만 쭈뼛쭈뼛 쳐다보며 집으로 향했습니다. 굳어버린 할머니의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습니다. 수숫대처럼 비썩 여읜 할머니의 허리가 더 가냘프게 보이고 얼굴이 핼쑥해진 것 같았습니다. 찬동이가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집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자동차 한 대가 스르르 와 멈추었습니다. 할머니는 얼른 길가 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피하며 물끄러미 자동차를 바라보았습니다.

“안녕하셨어요? 재영이 어머니.”
창문을 내리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람은 다음 아닌 뒷집에 사는 동현이 셋째 삼촌이었습니다. 차에 탄 나머지 가족들도 모두 얼굴을 내밀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어, 명절이라고 고향에 오는가. 멀리서 온다고 고생 많았네.”
할머니는 동현이 삼촌의 인사를 받고 잠시 반가운 웃음을 지어 보였습니다.

“저 재영이는 서울서 내려왔습니까?”
동현이 삼촌은 찬동이 큰아버지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동현이 삼촌은 찬동이 큰아버지의 어릴 적 친구입니다.

“재영이는 바빠서 못 온다는구먼.”
할머니는 헛기침을 하며 그만 입을 쏙 다물어버렸습니다.

“그래요? 요즘 같이 불경기일 때 일이 바쁘면 좋지요. 돈 많이 벌어 효도 하려나 보지요. 허허.”
할머니는 두 눈을 끔벅끔벅 이며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동현이 삼촌에게
손짓했습니다. ‘동현이는 가족들이 많이 와서 참 좋겠네.’ 찬동이는 뾰루퉁한 얼굴로 동현이네 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동현이네는 여섯 대의 자동차가 나란히 늘어섰습니다. 할머니는 동현이 할머니가 동현이 삼촌을 부둥켜안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찬동이는 동현이와는 너나들이한 사이인데 어째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동현이네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담을 넘을 때마다 찬동이는 아빠가 못 견디게 그리워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아빠 보고 싶어요. 아빠.’ 찬동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코를 훌쩍거렸습니다. 찬동이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 찬동이는 할머니와 아빠와 함께 세 식구가 살았습니다. 엄마는 찬동이가 아주 어릴 때 세상을 떠나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아빠마저
안 계신 세상은 허전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처음 맞는 설인데 큰아버지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찬동아, 뭐 하고 있냐? 어서 들어오너라. 감기 들라.”
할머니는 창문을 열고 찬동이를 불렀습니다.

“할머니 우리 집에도 동현이네처럼 손님이 많이 오면 좋겠어요. 그래야 세뱃돈도 많이 받을 텐데.”
찬동이는 할머니 앞에 바싹 다가가 잔뜩 볼멘소리로 말했습니다. 많이 생각한 후에 한 말이었지만 할머니의 가슴을 아프게 했나 봅니다. 할머니는 가느다란 한숨을 훅 내시었습니다.

“누가 아니랴? 그러게 말이여, 그러게 말이여. 큰아버지가 왔으면 우리 찬동이 세뱃돈도 많이 주고 좋았을 텐데.......이제 하나밖에 안 남은 자식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고 내 팔자가 왜 이런지 모르것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어린 네 앞에서 별소리 다 했구나.”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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