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주머니 안녕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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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주머니 안녕 (하)
  • 이정순
  • 승인 2019.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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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비야, 어디 있니? 손님들 오신다. 어서 나와 인사드려야지.”
밖에서 엄마가 부르는 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어요. 외할머니와 서먹하게 있는 것이 불편했던 나는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요. 외할머니를 얼른 피하고만 싶었으니까요. 대문 앞에는 벌써 외삼촌이 외갓집으로 들어서는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계셨어요. 오늘따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외삼촌이 참 근사하게 보였구요. 외갓집은 금세 손님들 목소리로 떠들썩했어요. 걸음걸이가 더딘 앞집 할머니 건넛집 할머니도 외삼촌의 환갑을 축하해주러 오셨지요.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하던 엄마와 외숙모는 정말 푸짐한 잔칫상을 차렸어요. 먹을 것들이 푸짐해서 입이 딱 벌어졌어요.

“햐 요즘 세상에 이 집은 참 드문 집이야. 다른 사람들은 환갑날 무슨 식당에 가서 밥 한 번 먹는 걸로 끝내는데 이 집은 수고스럽게 이 많은 음식을 집에서 다해서 동네잔치를 다 하는가. 잘 먹겠지마는 미안해서 어쩌누? 앞집 할머니가 잔칫상을 앞에 두고 한 마디 하시자 손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러게요. 아이구 맛있어 보이네.”
주름살이 쪼글쪼글한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이가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으셨어요.

“밖에서 환갑잔치 하면 편하기는 한데 저와 어머니가 몸이 안 좋아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힘들고 해서 집으로 초대하게 됐습니다.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 드시고 놀다 가세요.”
공손하게 말씀 하시던 외삼촌은 손님들에게 술 한 잔씩을 돌리기도 하셨어요. 외갓집은 점점 잔치 분위기로 무르익어 갔지요. 외사촌 언니와 오빠들은 외삼촌에게 큰절을 올리며 두툼한 돈 봉투를 드리기도 했고요.

“고맙다. 고마워.”
이렇게 말씀하시던 외삼촌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외할머니에게 큰 절을 올리는 것이었어요. 시끄럽던 집 안은 잠시 조용해졌어요. 무슨 일인가 모두 궁금해하는 눈치였지요.

“오늘 같은 날 제가 어머니께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해요. 어머니 지금까지 저를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이만큼 살아 있는 것도 다 어머니 정성 덕분입니다. 어머니 건강하게 우리랑 오래오래 살아요.”
외삼촌은 외할머니의 두 손을 꼬옥 잡아드리기까지 했어요.

“아이구, 효자여. 효자여.”
주위 사람들 중 누군가 이렇게 말하자 박수까지 치는 사람도 있었어요.

“내가 애비한테 해 준 게 뭐가 있나? 늙은 어미 모신다고 애비 고생만 시키는데.”
외할머니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시더니 기다렸다는 듯 바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기 시작했어요. ‘아, 저건 내 복주머니잖아.’ 나는 외할머니의 주머니 속에서 나온 복주머니를 보는 순간 눈이 동그래졌어요. ‘세상에 내 복주머니가 외할머니의 바지 주머니에 있었다니.’ 나는 그만 가느다란 한숨이 다 나왔어요. 어쩐지 불룩해 보이던 외할머니의 바지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 속에 복주머니가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요. ‘외할머니 제 복주머니 돌려주세요.’ 나는 당장이라도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입안에서만 맴맴 돌았어요. 잠시 머뭇거리시던 외할머니는 외삼촌에게 복주머니를 건네 주시면서 말씀 하셨어요.

“애비야, 먼저 오늘 환갑 맞이한 거 정말 축하한데이. 고마워할 사람은 애비가 아니라 바로 네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건 다 애비 덕분인거라. 20년 전 내가 쓰러졌을 때 나를 업고 상주 병원까지 가서 살려낸 것도 다 애비가 아니더냐. 오래 살다 보니 우리 큰 애비 환갑잔치도 다 보고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동안 애비한테 신세진 것을 생각하면 말로 다 할 수 없지만 다른 건 몰라도 옛날 말에 아들 환갑날 어미가 아들에게 복주머니를 선물로 주면 수명이 길어진다는 말이 있지. 그래서 내가 복주머니 하나만큼은 애비에게 꼭 주려고 준비해 뒀었지. 어쨌거나 애비는 이 복주머니를 잘 간직하면서 나는 건강하게 오래 살끼다 하고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빌어 보거래이. 우리 집안에 장손인 애비가 건강해야 가족들이 근심 걱정이 없는 기라. 어서 받아 두거래이.”
외할머니의 말씀은 참으로 길었어요. 내가 세상에 태어난 후 외할머니가 이렇게 오랫동안 말씀하시는 것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어요. 외할머니는 외삼촌에게 들려 줄 말을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것처럼 참으로 진지했지요.
외할머니와 외삼촌을 번갈아 보며 눈빛을 반짝거리던 사람들은 일제히 복주머니 쪽으로 쏠렸어요.

“어머니가 저를 이렇게 챙겨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정말 고맙습니다. 어머니 말씀처럼 병도 다 낫고 오래오래 살 테니 아무 걱정 마시어요.”
복주머니를 받은 외삼촌은 목이 메는지 어린애처럼 울먹이며 말을 잘 잇지 못하셨어요. 눈가를 살짝 훔치던 외삼촌이셨지요. 곁에 있던 엄마도 무슨 생각이 나는지 코를 흠흠 거렸어요.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어요. 복주머니를 찾아 가겠다고 철없이 떼를 부린 것 같아 엄마에게 살짝 미안해지기도 했어요. 외할머니가 왜 그토록 복주머니를 가지고 싶어 하셨는지 눈곱만큼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요. 나는 이제 영영 내 복주머니를 되가져 갈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어요. 복주머니는 나보다 외삼촌에게 더 소중하니까요. 외할머니께서 외삼촌을 챙겨 주시는 그 마음이 더 값진 것이니까요. ‘복주머니야, 복주머니야. 우리 외할머니 소원처럼 외삼촌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줘. 한 때 나의 보물 1호였던 복주머니 이제 안녕.’ 나는 복주머니 선물을 받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 외삼촌을 바라보며 외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오래오래 머물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내가 복주머니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을 때 엄마는 나를 꼭 안아줬어요. 나도 엄마를 꼭 안았어요. 아까부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외할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더니 눈을 찡긋하셨어요. 마치 나에게 무슨 할 말이 남아있는 표정을 그리며. (마지막 회)

이정순(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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