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신문에는 情과 숨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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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신문에는 情과 숨결이 있다
  • 박찬옥
  • 승인 2019.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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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새벽 찬 공기를 가르는 낮고 순한 소리, 레인지 위에 얹은 찻물에 물방울이 하나둘 떠오를 때쯤이면 영락없이 현관 앞에 당도하는 신문의 기척이다. 세상 이야기를 한 아름 품고 와서 풀어놓는 손님을 맞는 설렘으로 1면 톱기사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 24쪽 전면 광고란의 광고이면서 감성을 담아내는 내용까지 독파하고 나면 아파트 건너편 멀리 산등성이에 안개가 걷히고 능선 위에 눈부신 해를 두 번째 손님으로 맞이한다. “(…)/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을 한다./(…)” 박남수의 `아침 이미지'처럼 아침이 주는 생동감이 신문을 통해 본 세상 속으로 기꺼이 들어서게 하는 추동력을 자아낸다. 신문 내용들은 지루한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하루를 열어 갈 활력이 된다.

1960년대 강원도에서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강원일보에 연재소설이 있었는데, 그 소설로 시작해서 C중앙지 소설까지 읽고 나서야 다시 강원일보에서 지역 관련 기사와 국내외 뉴스를 훑어보는 것이 상례였다. 그 무렵 첫정을 함빡 쏟은 그 고장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은 신문의 행간도 놓치지 않으려 열독을 했었는데 그때의 습관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남아 있는 것 같다. 어느 여름 방학 강원도를 떠나 귀향하는 날 펑펑 울었던 일은 아직도 어제 일 같이 기억이 생생하다. 서른 살에 다시 강원도가 내 삶에 근원지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는데… 강원일보를 다시 구독하는 기쁨은 그리웠던 오랜 친구를 재회하는 이상의 뿌듯함이었다. 지역신문이란 무기물이 아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 같이 정이 묻어나고 숨결이 느껴지는 인간과 사물의 매개체라는 것을 오랜 세월 전에 체득한 바 그대로였다.

막내가 미국으로 대학을 진학할 때는 강원일보와 태백을 함께 딸려 보냈다. 신문은 일간이 아니라 주간이 돼 배송됐지만 태백은 월간잡지로 기숙사에서 흥미 있는 대목은 인기리에 번역물로 돌려 읽혔다고 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가 서 있는 곳의 토양, 바람, 햇빛 그리고 주변의 다른 나무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언중언'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내 막내는 든든히 뿌리내리기에는 아직 여린 나이에 생소한 토양으로 옮겨진 나무 같은 존재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생경한 토질에서도 강원일보와 태백이라는 햇빛과 바람이 영양소가 돼 튼실한 나무로 우뚝 설 수 있는 근력을 키워냈고 지금까지 그 역량은 발휘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강원일보 독자로서 누리는 빼놓을 수 없는 혜택에 대해 이런 기회에 감사의 예를 표하고 싶다. 바로 독자의 시력보호를 위해 많은 제약을 감수하고 글씨 키우기를 감행한 점이다. 신문을 대할 때마다 편안하고 시원한 느낌은 잔잔한 감동을 파문 짓게 한다. 다만, 불편 아닌 불편은 타 신문을 볼 때 조리개 기능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이랄까. 요즈음 지면에서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논설위원의 칼럼이다. 시대적 이슈를 심도 있게 천착, 통찰할 수 있는 기제가 돼 독자로 하여금 좀 더 분명한 생각의 기준과 행동 지침의 명확한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마음 기울여 읽고 있다. 오랜 세월에 걸쳐 폭넓은 애독자를 보유한 언론의 봉우리, 강원일보는 정론지로서의 소중한 가치를 독자와 함께 오래오래 지켜갈 행복한 신문이다.

박찬옥 (사)강원예절문화교육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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