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일보와 동행한 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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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와 동행한 60년
  • 김유진
  • 승인 2019.05.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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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일보는 올해로 창간 74주년을 맞았다. 지난해 창간 특집 강원일보 73년 발자취 `격동의 현대사'를 읽었던 생각이 떠오른다. 강원일보와 함께한 시간 60년, 감회가 새로웠다. 6·25전쟁을 겪었다. 고향 황해도 신계군을 찾아가던 아버지가 정착한 곳이 철원이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피난지에서 돌아가셨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정처없이 떠돌던 큰할아버지를 모셔왔다. 천도교 신자였던 큰할아버지는 신문 애독자셨다.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다. 할아버지는 신문 사설이나 칼럼을 스크랩해서 읽어주셨다. 때로는 종교, 철학, 사회적인 견해도 일러주셨다. 하루는 화장실에 다녀와 호된 질책을 받았다. 대통령 얼굴이 인쇄된 면을 화장지로 사용한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대통령의 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때가 많았지만 그 지면을 화장지로 쓴다는 것은 국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타이르셨다. 중학생이 돼 12㎞를 버스로 통학했다. 귀갓길에 이장님 댁에 들러 신문을 가져오니 신문 배송 시간이 예전보다 빨라졌다. 하루는 이장님이 신문 배달 의사를 물으셨다. 할아버지 신문을 전해드리려다 결국에는 부업이 생긴 것이다.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으로 인해 신문 검열이 심해지면서 배송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예 배송이 취소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신문 배달이 늦어지는데도 애독자들은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격려를 해줬다. 군부대에서는 언론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뒤늦게 입대한 신모 병장의 조언으로 스크랩하는 즐거움을 터득할 수 있었다. 중학교 3년 동안 신문 배달을 했다. 경제 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했을 때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모교 교무실 일을 돕는 일을 하게 됐다. 신문 스크랩 과제가 떨어질 때면 문학, 역사 등 주제별로 챙기며 쾌락을 느꼈다. 강원일보의 `言中言'은 이미 내 스크랩북에 가득했다. 고교 졸업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직장 2년 차에 군 복무를 하게 됐고 1970년도에 월남 파병을 하게 됐다. 제대 후 복직해서 강원도청 발령을 받았다. 강원일보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강원일보 73주년 특집기사에 강원일보 기자가 베트남에 파견됐다는 기사가 내 추억을 되살렸다. 총상을 입고도 살아왔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농업재해, 농업기상업무를 담당했다. 기상예보는 물론 해마다 반복되는 한발, 장마에 대한 보도 자료를 업무에 유용하게 활용했다. 농산물 종자 생산 업무를 담당했을 때도 기상에 대한 보도 자료는 중요한 업무지침이 됐다. 30여 년간 모은 데이터는 재해를 예방하고 종자 증식에 큰 보탬이 됐다. 퇴직하고 또다시 하늘을 쳐다보는 주말농장을 경영하고 있다. 어느 날 내 출근 시간보다 신문 배달 시간이 늦어 신문 구독을 취소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1주일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구독 신청을 했다. 신문이 없는 날은 세상이 온통 캄캄했다.

어느 날 `신사임당 상 수상' 소식이 보도됐다. 수상자는 전국에서 유명한 침선공예가 선생님이셨다. 그는 중국 간도 용정 광명여고 재학 시절 조선시대 왕실에서 침궁을 지낸 이정인 선생님으로부터 침선공예 기술을 전수받은 분이다. 내가 신문 배달 할 때 신문지국을 운영하시던 바로 그 선생님이셨다. 근래에 자녀들에게 선생님 안부를 여쭸더니 96세의 선생님은 신문 배달 소년을 잊지 않고 반가워하셨다. 강원일보와 함께한 60년 세월이 동행하고 있었다.
김유진 전 도청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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