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학교 문 연지 벌써 8년…아이들 꿈 영그는 것 보며 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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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 학교 문 연지 벌써 8년…아이들 꿈 영그는 것 보며 보람”
  • 어린이강원일보
  • 승인 2021.08.0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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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인생 44년, 홍천에서 새로운 꿈 펼치는 ‘인순이'
강원국제트리엔날레 홍보대사로 위촉된 가수 인순이(오른쪽)와 본보 허남윤 문화체육부장이 지난 2일 홍천군청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강원국제트리엔날레 홍보대사로 위촉된 가수 인순이가 지난 2일 열린 인터뷰에서 ‘제2의 고향' 홍천군과의 인연을 설명하고 있다. 홍천=김남덕기자

 

 

 
“1978년 3월1일부터 노래를 불렀으니까. 올해가 데뷔 몇 년 차가 되나 ….”

40년을 훌쩍 넘겼다는 말에 “햇수를 세지 않으니 모르겠네”라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서 44년 차 가수의 내공이 느껴졌다. “데뷔할 때 제가 만 4살이었다”는 뜬금없는 (기자의)나이 고백에 눈을 살짝 흘기더니 “제 나이가 너무 많다는 얘기는 아니죠?”라면서 큰 웃음을 지었다.

지난 2일 홍천군청에서 강원국제트리엔날레2021 홍보대사로 위촉된 가수 인순이(본명 김인순)와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부터 유쾌했다.

다문화가정 자녀 정착 위한 ‘해밀학교' 기숙사 개관 앞둬
“졸업생들 지금도 수시로 안부 전해…가장 큰 보람 느껴”

강원국제트리엔날레 홍보대사 위촉 “성공개최 힘 보탤 것”
“지금의 나를 만든 원동력은 낙천적 성격…내달 신곡 발표 계획”


■“홍천은 제2의 고향이에요”=인순이와 홍천군의 인연은 남달랐다. 경기 포천 출신인 그는 오랜 가수 생활을 하면서 강원도에서 공연한 것은 당연지사. 그러던 중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힘겹고 어려운 삶을 살지 않도록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자 홍천에 학교를 설립한 것이 ‘찐' 인연의 시작이었다.

“홍천에는 늘 감사한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불러만 주시면 만사 제쳐놓고 힘을 보태자고 여겼는데, 뜻하지 않게 봉사할 길이 열려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는 그의 말에 애정이 묻어났다.

인순이는 홍천군에서 올해 마지막 해를 진행하는 강원국제트리엔날레 2021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그냥 유명인으로 멘트 하나씩 던지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 홍보에 참여하며 큰 힘을 실어줄 계획이다. 올해 강원국제트리엔날레의 전시 오디오 가이드 녹음과 행사 공식 뮤직비디오 촬영 등 그가 성공개최에 힘을 보탠다. “홍천에서 하는 행사잖아요. 당연히 불러주셨는데 최선을 다해야죠.”

■“나는 교육자가 아니랍니다”=그가 홍천과 인연을 맺게 된 학교는 ‘해밀학교'. 다문화 가정 자녀들의 고등학교 졸업률이 너무 저조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자신이 걸어온 길과는 다른 평탄한 길을 걷게 해주고자 하는 신념으로 세운 학교다. 2011년 인순이학교 설립준비위원회(가칭)가 발족됐고, 이듬해인 2012년 (사)인순이와 좋은 사람들이 설립된 데 이어 2013년 4월 감격 속에 해밀학교가 개교했다.

무상교육으로 운영되는 해밀학교는 기본적인 교과과정뿐 아니라 1인1악기, 밴드, 농사, 수영, 코딩, 포디프레임(4D frame·수리과학 융합 교구) 등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아이들의 창의력을 키우고 있다. 중도입국자를 위한 한국어반도 운영된다. 이렇게 학교 이야기를 할 때 인순이의 표정은 한껏 상기돼 보였다. “처음에는 큰 것을 생각하고 학교를 세운 게 아니예요. 일단 감성적으로 시작하게 됐죠. 그러다 보니 걷잡을 수 없게 학교가 커졌고 …. ” 인순이를 돕는 많은 이들이 학교 운영에 십시일반 힘을 보태주고 있다.

교육자로 불려도 되겠다고 말하자 그는 손사래를 쳤다. “나는 절대 교육자가 아니예요. 진짜 교육자들은 학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이죠. 최고예요”라며 교사들의 헌신을 치켜세웠다. 김치창고를 개조해 시작한 학교에는 어엿한 건물과 운동장이 들어섰고, 이제는 기숙사 개관을 앞두고 있다. 인순이의 꿈이 영글어 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꿈 지켜주고 싶어요”=이처럼 해밀학교에 애정이 듬뿍 담긴 덕분에 인터뷰 내내 인순이는 학교와 아이들 자랑이었다. “이중 언어대회에서 우리 학교 아이들이 강원도에서 대상을 받았어요. 자랑스럽죠. 전국대회에서도 금상의 영예를 안았어요.” 해밀학교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총 9개국의 말들이다. 그만큼 다양한 국적의 다문화가정이 있다는 뜻이다. 해밀학교는 그것을 장점으로 승화시켰다. “지난해에는 학교에 경사가 있었어요. 우리 아이들 중 한 명이 강원외고에 합격한 거예요. 놀랍지 않나요?” 하고 물었다.

설립자인 인순이와 교사들, 그리고 학생들 간에 이러한 애틋함이 있기 때문에 해밀학교 졸업생들은 지금도 인순이와 교사들에게 안부를 전한다고 한다. “선생님 코로나 조심하세요”, “저 취직했어요. 잘 지낼게요” 등 이런 인사를 받으면 ‘내 선택이 잘못된 게 아니구나' 하며 되레 감사를 하게 된단다.

■“즐기기에도 부족한 인생”=44년간 가수로 살면서 학교를 세우고 운영 중인 그는 삶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솔직히 저는 음악을 전문지식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아요. 그냥 즐기니까 여태껏 가수로 살아올 수 있었죠. 그냥 가슴에 와닿고 즐기다 보면 감성이란 게 자연스레 충만해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인다. “부정적인 생각을 하기엔 세상이 너무 이쁘지 않나요?”

인순이의 이런 낙관적인 성격은 오늘날 그를 있게 한 원동력이기도 하다. 널리 알려져 있는 것처럼 흑인 주한미군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한국인으로서 정말 많은 고통이 있었음에도 지금의 성공한 가수가 되기까지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보다 나은 미래를 찾는' 그의 삶의 태도도 큰 영향을 미쳤다. 어릴 적부터 겪어 왔던 정체성 문제도, 한국에서 수십년 살면서 이젠 잊혀졌겠지 생각했지만 인순이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그냥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앞으로 나아갈 뿐”이란다. 그 답변에서 진정한 인생을 살아가는 법을 아는 그가 느껴졌다. 이제는 자신의 장점을 살려 최고의 가수로서, 아이들의 멘토로서 자신만의 인생을 가꾸고 있었다.

■“나는 가수다”=특히 그는 ‘가수'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나는 뼛속까지 가수”라고 말하는 그는 44년간 노래를 불렀고, 앞으로도 노래를 부르겠다며 자신의 천직은 여전히 ‘대중 앞에 서는 가수'라고 당당히 말했다. 인터뷰한 당일(8월2일)도 그는 서울 일정이 잡혀 있었다. “오늘 이현승씨가 보자고 하네요. 좋은 곡을 써놨다고…” 신곡을 들고 조만간 무대에 설 생각에 그의 표정은 한껏 상기돼 있었다. 무대에 대한 열정이 엿보였다.

인순이는 1978년 희자매로 데뷔했다. 데뷔와 동시에 첫 앨범 타이틀 곡 ‘실버들'이 가요차트 7주 연속 1위를 하며 걸그룹 트로이카 시대를 활짝 열었다. 1981년 솔로로 전향한 이후 1983년 발표한 ‘밤이면 밤마다'는 당대 공전의 히트를 치며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놨다.

■9월 중 신곡 발표 예정=인순이에게 인생 히트곡을 물었다. “‘밤이면 밤마다'와 ‘거위의 꿈', ‘아버지' 이 3곡은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또 ‘인순이'라는 브랜드를 널리 알린 노래”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이현승씨가 만든 노래를 9월 중 발표할 계획이라고 했다. “강원일보를 통해 인순이의 신곡 발표가 처음 공개되는 거네요”라고 농담조의 말을 던지자 그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렇죠. 아직 노랫말도 못 들어봤는데, 강원일보 애독자분들도 인순이 신곡에 많은 애정을 보내 주세요.”

인터뷰를 마치고 보충 취재를 위해 살핀 해밀학교 홈페이지를 통해 인순이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었다. 김인순 해밀학교 이사장의 인사말이 큰 울림을 전한다.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 흔들리지 않고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못 배웠습니다/ 그래서 책과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달랐습니다/ 그래서 치열한 경쟁사회에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어제의 결핍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입니다.”

문화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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