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 선생에 대해 알려주세요.
상태바
한서 남궁억 선생에 대해 알려주세요.
  • 어린이강원일보
  • 승인 2021.02.01 14: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Q. 강원도 홍천군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학생입니다. 어른들에게 홍천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 있는지 물어보면 한서 남궁억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이 분에 대해 알려주세요. (6, 금쪽이 남)

 

A. 홍천을 대표하는 독립운동가이며, 교육자이신 한서 남궁억 선생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한서 남궁억 선생은 1863년 서울 왜송골로 불리던 지금의 정동에서 태어났습니다. 20세 성인이 되는 나이에 우리나라 첫 외국어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그 후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의 통역관으로, 구미 6개국 순방 사절단의 통역 서기관으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서구 열강의 본 모습을 알게 되고, 자신의 생애를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헌신하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합니다.

 

1889년 궁내부 별군직을 시작으로 칠곡부사, 내부토목 국장, 성주목사, 양양군수를 역임하며, 청렴한 관리로서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1896년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에는 나수연, 유 근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계몽운동가와 언론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친일 정권으로부터 온갖 박해를 받으면서도 독립협회에서 실질적인 리더로서 계몽활동과 개화활동에 꾸준히 참여한바 여러 차례 투옥되어 많은 고초와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탈하자 다음 세대 교육에 관심을 갖고 교육 현장으로 뛰어들었으며, 같은 해 10월 배화학당 교사, 1912년 상동청년학원의 원장으로 독립사상 고취와 애국 가사 보급운동에 앞장섰습니다.

 

그 후 건강이 악화되어 1918년 서울을 떠나 홍천의 보리울(현재 서면 모곡리)로 낙향하여 1919년 모곡교회와 모곡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과 무궁화 보급운동 등 조국의 독립을 위해 애쓰셨습니다. 한서 선생은 산골 사람들이 깨어나야 민족이 바뀐다’, ‘개화해야 산다는 말을 많이 하며 시골 아이들에게 영어와 산술 교육, 성서와 한문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금쪽이 부모님 세대는 마을 골목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해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이 놀이가 한서 선생이 그 당시 아이들의 놀이에 무궁화를 접목시켜 만든 놀이로, 아이들 마음에 무궁화의 상징적 의미가 자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든 놀이입니다. 한서 선생은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3945일 숨을 거두셨으며, 향년 77세였습니다.

 

조국을 잃은 암울한 시기에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굳건하게 지켜나가신 한서 남궁억 선생의 정신을 우리 후손들이 이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홍천군청소년수련관 관장 박형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