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떠나시던 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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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떠나시던 날(중)
  • 이정순
  • 승인 2019.08.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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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여보. 우리 영민이도 저러는데 요양원에 모시자는 말은 좀 지나치네.”
아빠가 말끝을 흐리시며 말했습니다.

“이 집에서 내 마음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요. 저 지금 얼마나 속상한 줄 아세요? 저를 도둑으로 몰다니요. 어머니 저렇게 정신이 왔다 갔다 하실 때마다 미치겠어요. 정말.”
엄마의 목소리에는 짜증스러움이 묻어났습니다. 어쩌면 엄마 혼자서 오래도록 속을 태웠는지도 모릅니다. 엄마 말대로 할머니는 정말 어떤 날은 냄비를 까맣게 태우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화장실의 변기 물도 내리지 않아 엄마를 속상하게 했었습니다. 또 어떤 날은 머리가 터질 듯 아프다면서 약을 한 움큼이나 삼켜 엄마의 얼굴을 하얗게 질리게 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형수님 자식들이 이렇게 있는데 요양원에 보내면 우리는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요? 우리를 생각해서라도 제발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자는 말은 하지 마세요.”
작은 아빠는 얼굴을 붉히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앞으로 사셔봐야 얼마나 사신다고 그러셔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머니를 어떻게 그런 곳엘 보내요?”

“맞아요. 어머니가 이 집안일을 얼마나 많이 해주셨는데......흑흑. 언니 너무 한 거 아니에요?”
고모들도 난리법석을 떨며 서로 얼굴을 피한 채 슬픈 얼굴을 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할머니가 성큼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내가 너희들 하는 이야기 밖에서 다 들었다. 어멈아 미안하다. 내가 정신이 없어서 너를 오해했다. 내가 요양원으로 가서 너희들이 편할 것 같으면 내가 그렇게 하마. 그러니 서로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소리를 버럭 지른 할머니의 얼굴은 무척 굳어 있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그게 아니어요.”
아빠와 엄마는 얼굴이 빨갛게 변해서 할머니에게 볼멘소리를 해댔습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들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답답해 한숨만 나오는데 너희는 얼마나 답답하겠냐. 나 하나 없어지면 다 편한 것을. 그래. 내가 요양원으로 가마.”
할머니는 단단히 화가 나신 게 분명했습니다.

“할머니 가지 마세요. 할머니는 우리랑 살아야 해요.”
나는 할머니가 불쌍했습니다. 나를 키워준 할머니인데 할머니가 병이 들었다고 멀리 보내려는 엄마가 미웠습니다. 엄마도 할머니도 딴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엄마가 힘들어도 조금만 더 할머니를 잘 보살펴 드렸으면 싶었습니다. 우리 엄마도 언젠가는 늙을 테니 말입니다.
할머니의 병이 더 깊어지자 할머니의 정신은 더 오락가락해졌습니다.

“영민아, 어젯밤에는 너 할아버지가 꿈에 꽃마차를 타고 와서는 이 할머니를 데리고 가려 하더라.”

“할머니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무서워요.”
나는 문득문득 할머니가 무서웠습니다. 점점 이상해지는 할머니 때문에 불안한 날도 많았습니다. 우리 집은 오랜 시간 웃음이 없었습니다. 엄마 아빠의 얼굴은 슬퍼 보였습니다.

“큰일이네. 큰일이야. 우리도 계속 직장을 다녀야 하는데 별 뾰족한 수도 없고.”
엄마와 아빠의 걱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점점 할머니와 우리 엄마 아빠의 눈치만 살피게 되었습니다. 혹시 할머니 때문에 엄마 아빠가 더 싸우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조마조마했습니다. 할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는 있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물을 찾으면 물을 갖다 드리고 뭘 사 달라고 하시면 사다 주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이정순 동화작가
“아이고, 우리 예쁜 내 새끼. 기특하기도 하지. 내 말 다 들어주고 착해서 좋다 좋아. 영민아 이제 와서 돌아보니 세월이 한스럽다 한스러워. 어쩌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서 이 할머니가 이래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아프고 서러워 봐야 내 심정을 알겠지.”
할머니는 혼자 중얼거리다 희미하게 웃으셨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이정순 사천초교사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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